과학기술인, 정치를 이끌다
광산엔지니어 출신 대통령, 美 허버트 후버

내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다음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과학기술계에서도 이후 과학정책의 방향이 걸려 있는 문제인지라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언젠가 과학자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는 것은 과학기술계의 숙원이다.

하버트후버

193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후버가 일생의 정적(政敵), 루즈벨트에 패한 직후 두 사람이 승용차에 타고 루즈벨트의 취임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대통령 중심제 정치체제에서는 대통령이 누구인가가 정책 방향에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과학기술인들은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과학과 공학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만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1928년 미국에서는 과학기술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광산 엔지니어 출신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다.

성공한 광산 엔지니어, 상무장관 발탁 뛰어난 업무수행
우리 식으로 말하면 허버트 후버는 이공계 출신의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그는 이공계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공부를 바탕으로 꽤 오랫동안 엔지니어로서 활동한 진정한 과학기술자였다.
후버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지질학과 광산학을 공부했다. 1895년 졸업 후에는 영국계 광산 회사에 고용되어 광산 엔지니어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미얀마, 남아프리카 등 세계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질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금이 묻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내곤 했다. 또한 그는 기술적인 문제 해결에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채굴 과정에서 다량의 아연 찌꺼기가 버려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해결책으로 아연 찌꺼기를 걸러내는 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후버는 학계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가 스탠퍼드와 컬럼비아에서 했던 강의는 <광산학 원리(Principles of Mining)>(1909)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이 분야의 중요한 교과서가 될 정도였다. 이 밖에도 그는 미국 광산 및 금속 엔지니어협회의 회장, 미국 공학학회들의 연합인 미국 엔지니어 회의의 의장을 맡는 등 학계를 대변하는 엔지니어로서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펼쳤다.


광산 엔지니어였던 후버는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에 있던 후버는 자신이 가진 재력과 조직력을 동원해서 유럽에 남아 있던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본국으로 보내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와 함께 독일의 침략으로 심각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벨기에를 돕는 구호 활동을 펼쳤다. 그는 독일 수뇌부를 만나 벨기에 전쟁 난민들에게 제공되는 식량 및 이를 위한 수송선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기부를 받는 등 적극적으로 구호 활동에 나섰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광산 엔지니어에서 국제적인 박애주의자로 거듭났고, 국제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그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후버댐

미국 남서부 콜로라도강에 1936년 건설된 후버 댐.

“산업발전은 과학발전에 의존…기초과학 더 지원해야”
국제적인 영웅으로 부상한 후버를 정치계가 놓아둘 리 없었다. 전쟁 직후 귀국한 그에게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공화당을 선택했고, 그렇게 후버의 정치적 행로가 시작되었다.
정치가로서 후버의 능력은 1921년 상무부 장관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광산 엔지니어 시절 했던 것처럼, 그는 미국 산업 전반에서도 낭비를 줄이고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부 경제 정책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상무장관이자 전직 엔지니어로서 그는 과학 연구, 그 중에서도 순수과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1925년 미국 기계공학자 학회(American Society of Mechanical Engineers)에서 순수과학 연구를 위한 재정 지원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멀리 바라보는 안목을 가진 산업계의 리더들은 산업 발전이 과학 발전에 의존하고 있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기초과학에 대해 훨씬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 우리는 우리나라의 실용성을 자랑스럽게 여겨왔습니다. 순수과학에 적절한 조직적 재정 지원을 하는 것이 실용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1927년에 발표한 ‘국가와 과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그는 경제 발전의 밑거름은 순수과학임을 강조하며, 정부와 산업계, 그리고 각종 재단 차원에서 순수 과학에 대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순수과학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그는 다각적인 활동을 펼쳤다. 1925년에는 미국 국립 과학아카데미에서 펼친 국립연구기금(National Research Fund) 조성 캠페인의 책임을 맡아 산업계나 개인 부호들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또한 그는 상무장관으로서 정부의 과학 연구를 강화했다. 이 덕에 국립표준국(오늘날의 미국 국립표준연구소)의 예산은 1920년대 동안 135만 달러에서 348만 달러로 2배가 넘게 증가했고, 내무부에 소속되어 있던 광산국은 상무부로 이관되어 그 예산이 130만 달러에서 273만 달러로 늘어났다. 이와 같은 예산 증가를 통해 정부 기관에서 순수 과학 연구 분야의 강화 및 확대가 이루어졌다.

후버 하우스

후버가 그의 부인 루와 함께 지내던 후버 하우스. 그가 공부하고 강의했던 스탠퍼드 대학에 있다.

순수과학 연구에 대한 정부지원 확대·강화
1차 세계대전 동안의 박애주의적 활동과 1920년대 상무장관으로서 뛰어난 업무 수행 능력으로 그의 정치적 인지도는 더욱 높아졌다. 1928년 공화당 대표로 후버는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밀리컨과 같은 그의 과학자 친구들이 대통령 유세를 함께 하며 후버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지지를 보여주었다. 1929년, 드디어 후버는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되었다.


화려했던 과거와 달리, 대통령으로서 그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다. 1929년 10월,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 국민들은 그동안 그가 보여준 능력을 신뢰하며 그가 곧 이 난국을 타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작은 정부와 균형 예산을 강조해 온 그의 정책은 경제 대공황 타개에 적절치 못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그의 재선을 막았고 엔지니어 대통령 후버의 영광은 대공황으로 막을 내렸다. 오늘날 그는 미국에서 역대 최고의 상무장관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정치인으로서 후버는 순수 과학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과학에 대한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그의 후임인 루즈벨트 시기에 들어와서였다. 과학기술에 호의적이었던 후버 시절이 아니라, 그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루즈벨트 시절에 과학자들이 그런 필요성을 인식하고 요구했던 것은 아이러니다.

글 | 박민아 (한국과학기술원 초빙교수)
출처 | FOCUS 6월호 발췌

블로그 이미지

굿가이(Goodguy)

우리 생활 속 과학이야기